어제는 펠리컨 마을에서 맞는 첫날 밤이었다. 시끌벅적한 도시에서만 살다가 이런 시골에 내려오니, 그것도 황폐해진 농장의 집에서 잠을 청하려니 왠지 뒤숭숭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괜히 내려왔나 싶을 정도로 농장은 망가져 있었다. 공간만 넓지, 이건 뭐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면서 뒤척이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첫날부터 일기를 밀린 이유다.
스타듀 밸리에 도착한 건 어제 오후였다. 루이스가 통화할 때 언급했던 로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빈은 꽤 친절하게 나를 맞았다. 로빈은 루이스가 우리 집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농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천천히 걸어가잔다.
농장 입구에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내가 머물 집이었다. 루이스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루이스는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잘 지냈다며 나를 다독였지만, 로빈은 집이 말 그대로 '구리다'며 웃었다. 초면에 그거 실례이지 않나? 라고 대꾸하려다가, 로빈 특유의 쾌활함이겠거니 여기기로 했다. 실제로 그녀의 표정에도 그리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고.
루이스는 로빈의 말을 귀담아듣지 말라고 했다. 그녀가 집을 수리하고, 새로 건축하기도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집을 넓히게 하기 위한 수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 이 동네 개그 코드가 이런 식인가 본데, 적응해야겠다.
루이스가 입주(?) 선물을 두고 갔다. 파스닙 씨앗이었다. 이걸로 시작해보라는 걸까. 그래, 연습 삼아 이걸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집 앞을 정리했다. 나무를 베고, 잔디를 깎았다. 호미로 땅을 살짝 다듬은 뒤, 파스닙 씨앗을 심고 물을 줬다. 그래도 어디서 본 건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지쳐서 곧바로 쉴까 싶었다가, 할아버지의 말씀도, 루이스의 말도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마을 주민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마을이 크지 않으니, 산책하듯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면 되겠지 싶었다.
농장에 핀 수선화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씩 건넸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마니'였다. 그녀는 목장에서 가축과 관련 물품을 팔고 있다며, 언제 한 번 놀러 오라는 말을 했다. 그래, 농장에는 가축도 있어야겠지,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마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레아가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 봄철의 펠리컨 마을은 정말 사랑스럽다며, 이사 오기 좋은 시기를 골랐다고 환영했다.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게, 왠지 좋았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언덕을 따라 오르며 로빈의 집으로 향했다. 감사 인사도 전할 겸해서. 로빈은 마을에서도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중간에 폐허 같은 건물이 한 채 있는 게 왠지 좀 무서웠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로빈의 가족이 나를 맞아줬다. 로빈의 남편 드리트리우스는 과학자란다. 집에 연구소를 차려둔 게 독특했다. 그와 닮은 마루는 딸이었다. 새로 온 나를 무척이나 반기는 듯했다. 이런 시골에서는 한 명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역학 관계가 크게 바뀔 수도 있다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한단다. 아니, 뭐, 내가 그렇게까지 크게 뭘 할 사람은 아닌데.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왠지 로빈과는 썩 닮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언급하는 건 실례이니까.
로빈은 지하에 세바스찬이라는 아들도 있다고 했다. 거실에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그는 왠지 그곳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로빈에게 잘 챙겨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고, 다시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대체로 조용했다. 중간에 개울이 흐르고, 돌다리가 놓이기도 한 것이 꽤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 이게 시골 마을이지.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나 보다. 독특하게 생긴 건물이 눈에 띄어서 들어갔더니, 고고학 사무소였다.
고고학 사무소 소장 건터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전에 있던 큐레이터가 이곳의 소장품을 싹 털어가서, 지금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거라고. 그러면서 나한테 새로운 유물을 들고 오면 전시할 테니 도와달란다. 아니, 이제 처음 여기에 도착한 사람한테 유물이 어디에 있다고.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
엘리엇이라는 아저씨는 조금 느끼했다. 나를 만나자마자, '우리 모두가 학수고대하던 새 농부'라며 추켜세웠다. 해변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는 사람이란다. 보헤미안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엘리엇에게 해변이 가깝냐고 물었고, 그는 손가락으로 다리 건너를 가리켰다. 바로 옆이 해변이라고.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바다로 향했다. 그래, 바다가 보고 싶었다. 경쾌하게 들이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도 이곳으로 오기로 결정했을 때 상상한 장면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 낚싯대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해안에 집이 한 채 있었다. 엘리엇의 오두막이었다. 바다에 설치된 목조 데크 위에도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낚시용품을 파는 상점 같았다. 주인장은 낚시를 떠났는지, 내일 돌아온다는 메모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어느덧 저녁. 마을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면 주점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모처럼 맥주 한잔하고 싶기도 했고. 가는 길에 '페니'라는 주민을 만났다. 그녀는 뭔가 소심해 보였는데, 수선화를 건네자 미소를 보였다.
월요일 저녁이었지만, 주점은 손님이 좀 있었다. 바 끄트머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을 팸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술을 꽤 좋아하는 듯했다. 나도 좋아하는데. 첫날부터 내 알콜라이프를 들킬 수는 없으니 참기로 했다.
스타드롭 주점의 주인장이자 주방장인 거스, 종업원 에밀리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밀리는 내가 이 마을과 사랑에 빠질 거라며 웃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행복이 느껴졌다.
셰인이라는 사람은 조금 까탈스러웠다. 인사를 건넸더니, 왜 말을 거느냐며 신경질을 냈다. 나도 모르게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가. 조금 특이한 사람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마을 대장장이, 클린트를 마주치기도 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도구를 손봐줄 수 있다며, 나중에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이런 걸 하나씩 기록해 두어야 나중에 잊지 않겠지.
밤이 늦었다. 오늘 밤은 어제보다는 잘 잠들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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